| 경인한국학연구총서 154 |
조선시대 번호藩胡 연구
한성주 저
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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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문화사
양장
152*224mm(A5신)
374쪽
2018년 3월 30일
9788949947242
책 소개
전근대 영토 인식은 오늘날처럼 단선적인 것이 아니었다. 특히 조선시대 두만강 유역에 대한 영토 인식은 중층적으로 나타났다. 조선의 관원이 파견되어 조선의 관할로 인정되어지는 범위와 관원이 파견되지 않더라도 조선의 법령과 왕명이 미치는 조선의 영역이 서로 다른 양상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즉 두만강 바깥 지역이더라도 조선왕의 법령과 왕명이 미치는 범위가 있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가운데에는 藩籬와 藩胡가 있다. 번리는 ‘울타리’라 뜻이고, 번호는 藩과 胡의 합성어로 ‘울타리를 이루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조선에서는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들에 대해서 조선의 번리라고 인식하였고, 조선 중기부터는 번호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들을 번리라고 인식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고려시대 윤관이 여진을 정벌한 후 9성을 설치하였는데, 두만강 밖 선춘령에 공험진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두만강 이북 지역이 고려의 땅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보다 직접적인 것으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두만강 유역에서 성장, 활동했기 때문에 이 지역이 祖宗舊地, 즉 조상의 옛 땅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성계가 고려 말에 東征西伐할 때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들은 이성계에게 종군하였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 자신에게 종군한 여진인들에 여러 관직을 주었던 것도 이러한 인식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주지하다시피 함경도의 6진은 세종이 설치한 것이지만, 이미 태조 때부터 두만강 유역까지 조선의 행정구역으로 편성하였고, 이 지역에는 조선인들과 여진인들은 혼거하여 왔다. 6진 설치 이전부터 두만강 유역 여진인들을 조선의 번리로 인식해 온 결과 조선은 明과 치열한 외교전 끝에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동북면 11처 여진의 귀속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세종 때 두만강 유역에서 발생한 여진 세력의 변화에 맞춰 6진을 설치하여 조선의 실질적인 관할을 두만강까지 확대하였다. 6진을 설치하였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모든 여진인들을 강 밖으로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진인들을 몰아낼 경우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되는 여진인들과의 갈등과 분쟁으로 함경도 지역의 안정은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결국 6진 설치 후 조선인들은 성 안에서, 여진인들은 성 밑에 살면서 평화 공존의 존(zone)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6진의 성 밑에 사는 여진인들을 조선에서는 城底野人이라고 불렀는데 사실상 이들이 번리 및 번호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두만강 바깥에도 조선의 번리가 있었다. 즉 두만강 내외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조선에 복속되어 온 여진인들이 조선의 울타리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들은 조선의 정책에 부응하여 조선으로부터 정치 경제적
이익과 혜택을 받았고, 조선인들과 교류하면서 점차 사회 경제적 성장을 거듭하였다. 특히 조선에서는 번리들을 구제 구호하였으며, 먼 지역의 여진인들이 번리를 침입하면 조선군이 나가 싸워 그들을 보호하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만 조선에서 번리라고 불리는 여진인들은 조선의 법령과 왕명을 따라야했고, 해마다 조선왕에게 진상 물품을 보내야 했으며, 북방 및 여진인들의 동향을 수시로 보고해야만 했다. 따라서 여진인들이 조선을 침입하였을 경우 조선에서는 6진과 두만강 유역을 둘러싸고 있는 번리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조선과의 교류 속에서 두만강 유역의 여진 번리들은 거듭 성장하고 있었다. 6진 지역을 중심으로 두만강 내외에 점차 중심 부락이 형성되었고, 조선에서는 이러한 중심 부락을 번호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 중기가 되면 번리라는 말 대신 번호라는 말이 보다 더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16세기가 되면 번호들의 사회 경제적 발전은 6진 지역 조선인 사회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여진 사회가 발전한 만큼 조선의 정책과 인식이 변화하거나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6진 지역을 처음 설치했을 때와 같이 번호의 이탈을 방지하려 하였고, 민족과 민족의 경계를 나누어 왔으며, 조선에 복속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해 왔다.
결국 사회 경제적 발전에 힘입은 번호들은 조선을 이탈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16세기 후반에 발생한 ‘니탕개의 난’이다. 당시 여진인들은 2만여 명의 군사가 6진 지역을 횡행하였고 조선에 큰 경각심을 주기 충분하였다. 특히 조선에서는 번호들의 침입을 ‘亂’이라고 불러왔는데, 이는 조선에서 번호들을 어떻게 인식해 온 것인지 잘 알 수 있게 해 준다. 즉 조선에서는 번호들이 조선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아온 것이다. 번호들의 반란은 조선의 1차 방어선이 오히려 조선을 공격하는 상황을 초래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또한 임진왜란의 발생은 번호들의 이탈을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조선에 불만을 품었던 번호들은 6진 지역을 약탈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도 자주 조선의 鎭堡들을 침입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번호의 침입에 대응하고 이탈을 막기 위해 征討라는 이름으로 여진 부락을 정벌하였다.
한편 여진 세력은 두만강 일대의 번호 부락만이 집중화되고 발전한 것만은 아니었다. 농경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요동 일대의 여진 세력들도 역시 발전해 갔다. 이른바 ‘골(kol, 골짜기)에서 고로(golo, 고을)로, 그리고 구룬(gurun, 나라, 國)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누르하치와 부잔타이라고 할 수 있다. 누르하치는 흩어져 있던 건주위를 통합하고 점차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으며, 해서위의 울라부를 이끄는 부잔타이 역시 누르하치와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다.
임진왜란 전부터 시작된 두만강 유역 번호들의 반란은 이제 누르하치 및 부잔타이와 연계되었으며, 누르하치와 부잔타이는 번호들을 복속시키기 위해 경쟁하였다. 그리고 부잔타이가 먼저 직접적인 군사 행동을 벌여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을 침략하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조선의 6진 지역을 침입하였다.
부잔타이의 번호 침략은 필연적으로 누르하치의 개입을 초래하였고, 마침내 조선의 경내인 종성진 烏碣巖에서 누르하치와 부잔타이의 군대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승리함으로써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은 누르하치에게 철폐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김종서가 함경도 6진을 설치한 것이 2백년이 되었고, 성 밑에 살고 있는 여진인들로 울타리를 삼아 藩胡라고 불러왔다고 하였는데, 근년에 건주위의 누르하치가 번호들을 노략질해 잡아가서 거의 남아 있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차가운 것처럼[脣亡齒寒] 번호가 없어지니 우리나라에 미치는 근심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임진왜란이 근세 동아시아 변동의 서막이었다면, 실제 변동의 核은 만주였다. 사실상 明중심의 국제질서를 무너뜨리고 바꾼 것은 누르하치였다. 누르하치는 주변 여진인들을 통합하여 마침내 후금을 세우고 이후 淸이 중국을 차지하는 밑거름을 세웠다. 누르하치의 두만강 유역 번호 침탈과 철폐는 여진 통합이라는 단면을 보여주지만, 누르하치가 국가를 수립하는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은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북방의 울타리가 철폐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누르하치가 조 명연합군을 격퇴하면서 조선과 후금과의 관계는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이러한 조선시대 번리, 번호의 관점에서 그동안 썼던 글을 재구성한 것이다. 필자는 조선시대 여진관계사를 전공하면서 2010년부터 여진 번리와 번호에 주목하여 왔다. 처음 의도는 조선의 6진 설치 이후 조선과 여진과의 관계를 재조명하고자 하였지만, 연구를 거듭할수록 조선의 여진 번리 인식과 번호에 대한 정책이 북방 정책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는 모두 9개의 논문을 3편으로 나누어 편집했다.
제1편 ‘번호의 형성과 발전’에서는 조선의 영역 인식이 중층적이고 중첩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을 두만강 유역 및 여진인들에 대한 번리 인식과 연관하여 살펴보려고 하였다. 그리고 여진 번리 번호의 형성과 성격을 규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번리와 번호 구축과 관련된 조선의 변경 정책을 검토함으로써 조선의 정책이 가지는 양면성을 검토하였다. 결
국 조선의 번호 정책이 한편으로는 조선의 방어에 도움이 되었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번호의 성장과 발전에 영향을 미쳤던 부분을 규명하는 데 노력하였다.
제2편 ‘번호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에서는 임진왜란 전후 여진 번호의 조선 침구 양상, 부잔타이와 누르하치의 침입 양상을 세부적으로 파악해 보았다. 그리고 각각에 대한 조선의 대응이라는 측면을 살펴보려고 하였다. 번호들의 이탈 및 조선 침입에 이어 부잔타이, 누르하치의 두만강 유역 진출에 따른 번호 침탈이라는 상황에서 조선의 대응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 부분을 통해 각 시기 및 대상에 따라 조선의 북방 정책의 변화 추이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제3편은 ‘번호를 둘러싼 교류와 인간상’으로 세 가지 개별적 사례들로 구성하였다. 첫 번째는 번리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신숙주의 여진 和解事의 과정과 성격을 살펴보았다. 두 번째는 번리 번호를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대여진관계의 특징과 6진 지역의 조선인과 여진인들의 모습을 구현해 보려고 하였다. 세 번째는 번호였던 小弄耳가 부잔타이 및 누르하치의 침입을 거치면서 외교 실무자로 바뀌는 양상을 파악함으로써 조선과 여진과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했다.
목차
◆ 프롤로그


제1편 藩胡의 형성과 발전

제1장 朝鮮前期 豆滿江 流域에 나타나는 두 개의 ‘朝鮮’
1. 머리말
2. 두만강 유역으로의 管轄 및 領域 확대
3. 6鎭 설치와 두만강 유역에 대한 ‘藩籬’ 인식
4. 女眞을 둘러싼 明과의 ‘隣境’과 ‘編氓’ 문제
5. 맺음말
제2장 조선 전기 두만강 유역 ‘女眞 藩籬・藩胡’의 형성과 성격
1. 머리말
2. 鮮初 女眞 藩籬 인식과 5鎭의 설치
3. 5鎭 설치 후 女眞 藩籬에 대한 정책
4. 5鎭에서의 女眞 藩胡의 발전과 中心 部落의 형성
5. 맺음말
제3장 조선 변경정책의 허와 실 ―두만강 유역 女眞 藩胡의 성장과 발전―
1. 머리말
2. 藩(蕃)의 개념과 여진 藩籬 구축의 성격
3. 藩胡의 성장과 여진 정책의 양면성
4. 맺음말


제2편 藩胡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

제1장 임진왜란 전후 女眞 藩胡의 朝鮮 침구 양상과 조선의 대응 분석
1. 머리말
2. 1583년 ‘尼湯介의 난’ 침구 양상
3. 임진왜란 전후 藩胡들의 침입 양상
4. 藩胡 침입에 대한 조선의 대응
5. 맺음말
제2장 조선 선조대 후반 忽剌溫 부잔타이[布占泰]의 침입 양상
1. 머리말
2. 부잔타이의 두만강 유역 진출 시도
3. 부잔타이의 조선 침입과 藩胡 침탈
4. 潼關鎭 함락과 조선의 件退 征討
5. 조선의 職帖 수여와 부잔타이의 실패
6. 맺음말
제3장 누르하치의 두만강 유역 번호 침탈과 조선의 대응 고찰
1. 머리말
2. 누르하치의 두만강 유역 진출
3. 누르하치의 번호 철폐와 조선 침입
4. 누르하치의 동해 지역 세력 확장
5. 조선의 외교적・군사적 대응
6. 맺음말


제3편 藩胡를 둘러싼 교류와 인간상

제1장 세조대 申叔舟의 파견과 ‘女眞 和解事’
1. 머리말
2. 여진 세력간 투쟁과 조선의 대응
3. 申叔舟의 派遣과 女眞 和解 시도
4. ‘女眞 和解事’와 두만강 유역에 대한 인식
5. 맺음말
제2장 조선의 對女眞關係와 6鎭지역 사람들
1. 머리말
2. 번리 구축과 대여진관계의 특징
3. 6진 지역의 조선인들
4. 6진 지역의 여진인들
5. 맺음말
제3장 胡差 小弄耳를 통해서 본 조선・여진 관계의 변화
1. 머리말
2. 胡差, 差胡의 개념
3. 부잔타이의 침입과 小弄耳의 변화 : 藩胡에서 忽差로
4. 누르하치의 침입과 소롱이의 변화 : 忽差에서 胡差로
5. 맺음말


◆ 참고문헌

◆ 찾아보기
저: 한성주
강원대학교 사학과 졸업
강원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박사
전 강원도사편찬실 편찬연구원
전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현 강원대학교 사학과/교양학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