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학총서 -근대전환기의 국가와 민- 4 |
[2019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대한제국의 양전
김건태 저
20,000원
20,000원
판매중
경인문화사
양장
152*224mm(A5신)
284쪽
2018년 9월 7일
9788949947587
책 소개
안동시청 지적과에 문의해 보니 우리 마을 경지 정리가 1967년에 있었다고 한다. 나는 이 해에 지적도를 처음 보았다. 우리 집 대청에서 낯선 아저씨 여러 명이 생전 처음 보는 컴퍼스와 삼각자를 비롯한 각종 신기한 기구를 가지고 커다란 종이에 선을 긋는 모습이 지금도 어렴풋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커서 생각해보니 그 때 그려진 그림이 바로 경지 정리로 새로 생긴 경계선이 반영된 지적도였다. 어릴 때 기억을 지금까지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경지 정리 때 받은 문화적 충격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불도저와 덤프트럭을 처음 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괴물 같아 가까이 가기 무서웠다. 그런데 인심 좋은 기사분이 여러 차례 옆자리에 태워주어 괴물 같던 중장비도 나중에는 꽤 친근해졌다.
커서는 경지 정리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리가 된 들판의 전답 경계는 마치 바둑판처럼 반듯했지만 괴물같은 중장비가 지나가지 않은 계곡 전답의 경계는 예전처럼 구불구불했다. 농업사 연구를 하면서 경지 정리의 또 다른 특성을 알 수 있었다. 경지 정리가 된 논은 3~4두락이 되어도 대체로 한 배미[야미]인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골짜기 논은 2~3두락만 되어도 3~4배미를 훌쩍 넘는 경우가 많다. 추상화를 연상케 하는 다양한 선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전답 경계와 조각보처럼 내부가 좁게 나누어진 논을 보고 자란 경험은 광무양전 당시의 논밭 모습을 연상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조선시대 어린도(魚鱗圖)에 대한 갈증도 경지 정리와 관련된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약 20여 년 전 1720년에 작성된 경상도 용궁현 양안을 활용하여 경자양전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용궁현 7개면 양안을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에 입력하여 몇 가지 분석을 시도했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공력을 쏟은 연구였지만 학계에 새로운 견해를 제출하지는 못했다. 문제의식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관심의 초점이 민(民)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가는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양안을 활용하여 농업문제와 관련된 연구만 진행하고 부세문제를 연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용궁현 양안 연구를 통해 얻은 것도 있었다. 양안만 가지고는 양전 당시의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예컨대, 용궁현 7개 면 양안에 올라있는 대(垈)의 필지수와 176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기재된 용궁현 호수는 큰 차이가 있다. 양안 분석에서 1개 면이 빠진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양자의 차이가 매우 크다. 후일 안 사실이지만 여지도서에 실린 용궁현 호수도 당시 실재하던 호수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튼 용궁현 양안은 실재하던 대를 누락시켰거나 전(田)으로 기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자양전 당시 왜 어린도를 작성하지 않았는지 더욱 궁금해졌다.
그 후 경자양전에 대한 연구를 잠시 접어두고 단성호적 전산화 작업 및 호적 연구를 진행했다. 호적 연구를 통해 양안 연구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다. 호적도 당시의 ‘자연가(自然家)’와 인구에 대해 극히 제한된 정보만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호적에 기재된 호는 ‘자연가’를 여러 가지 형태로 편제한 일종의 부세단위였다.
그리고 호적은 자연가 를 편제하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고, 그 결과만 전하기 때문에 인구사 연구 자료로는 그 한계가 뚜렷하다. 호적도 양안처럼 당시 실상을 일정 정도 가공하여 기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양안도 호적처럼 부세문제와 관련된 연구의 기초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당시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면 양안을 활용하여 국가[부세문제]와 민[농업문제]을 아우르는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 광무양안과 토지대장을 비교한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의 예전 연구가 떠올랐다. 컴퓨터의 도움을 받으면 두 장부를 쉽게 연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적 전산화 작업과 연구를 통해 컴퓨터의 위력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무양안과 토지대장 연결 작업을 도와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왔다. 2009년 김인걸 교수가 연구비를 주선해 주었다. 호적 전산화를 해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광무양안과 토지대장을 연결할 때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두 장부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했다. 나를 비롯하여 박현순(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김종진(현 충주교육대학교 교수), 이민우(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사) 등 4명이 연구팀을 결성하고, 충청도 한산군 계곡 지역에 위치한 4개 마을의 광무양안과 토지대장을 연결해 보았다. 1년 정도 걸린 작업 과정에서 두 장부의 특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수작업으로 두 장부를 연결할 수 있음을 확인한 다음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했다. 2010년 김인걸 교수에게 부탁해서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부 서진욱 교수를 소개받았다. 이번에는 서진욱 교수가 연구비를 마련하였다.
우리는 두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이민우, 정희찬(현 국사편찬위원회 학예사), 이재경(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사)은 수작업으로 한산군 평야지대에 위치한 3개 마을 광무양안과 토지대장을 연결하고, 나와 김소라(현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강사)는 서진욱 교수 연구실 팀원과 함께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을 시작했다. 대략 반년 정도 걸려 JigsawMap이라 이름 붙인 프로그램이 완성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수작업으로 연결해 둔 여러 마을의 광무양안과 토지대장을 다시 연결해 보았다. 짧게는 1주일 길게는 보름 정도 걸려 한 마을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때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책은 나 혼자만의 작업물이 아니다. 김소라군은 내가 두 장부를 연결하고 나면 그 내용을 검토하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는데, 나는 그 대부분을 수용했다. 연구조교였던 김한빛군은 내가 입력한 광무양안과 토지대장 엑셀파일을 JigsawMap 프로그램에 앉혀주었다. 이 책에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린 산뜻한 그림이 여러 장 들어있는데, 모두 원에스원 허윤정 대표 작품이다. 경인문화사 편집부에서 복잡한 원고를 깔끔하게 편집해 주었다. 김인걸 교수 이하 여러 분들께 감사드린다.
목차
책을 내면서

서 론

1장 연구방법론
1. 광무양안의 자료적 특징
2. JigsawMap 개발과 활용
1) 광무양안과 토지대장 엑셀 입력
2) 지적도 디지털화
3) 광무양안과 토지대장 필지 연결
4) 필지 연결 후 양전도의 변화
5) 광무양안・토지대장 연결파일 출력

2장 양지아문 양전
1. 실지 조사
1) 자료 소개
2) 실지 조사 과정
3) 실지 조사 현황
2. 인민의 관심
1) 대상 지역
2) 방위 인식
3) 결부 산출
4) 사람 파악
소결

3장 지계아문의 재 양전
1. 인민의 요구 수용
1) 대상 지역
2) 두 종류의 광무양안
3) 다양한 성격의 전답
2. 왕실 지시 이행
1) 대상 지역
2) 양지아문 양전
3) 지계아문 양전
소결

4장 지계아문 양전
1. 조선시대 소유권 증빙제도 계승
1) 대상 지역
2) 실지 조사
3) 관계의 성격
2. 조선시대 전세정책 계승
1) 대상 지역
2) 실지 조사 현황
소결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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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김건태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조선시대 농업사를 비롯한 사회경제사 연구와 호적에 근거한 역사인구학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논문
「19세기 농민경영의 추이와 지향」, 「한국문화」 57, 2012
「19세기 집약적 농법의 확산과 작물의 다각화」, 「역사비평」 101, 2012
「19세기 공노비 후손들의 삶」 「민족문화연구」 69, 2015
저서
『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경영』, 역사비평사, 2004
『한국 역사인구학의 가능성』(공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6
『A Global History of Historical Demography』(공저), PETER LANG,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