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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백하일기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자료총서 4
경인문화사 · 2011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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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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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망명 한인들의 정착과정을 보여주는 『백하일기』를 국역한 책. 백하 김대락이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만들어가던 과정을 기록한 『백하일기』를 통해 만주 사회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사를 엿볼 수 있다.

목차

  • 발간사
    일러두기
    화보
    김대락 가계도

    해제
    서정록
    임자록
    계축록
    찾아보기

    국역 백하일기 참여자 약력

출판사 서평

1. 가계와 학문적 배경

김대락은 1845년(헌종 11)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우파愚坡 김진린金鎭麟(1825 ~1895)과 어머니 함양박씨(1824~1877, 예천 맛질, 부친 박득영朴得寧)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대락의 자는 중언中彦, 호는 분서賁西라 하였는데, 후일 만주에 들어가 백두산 언저리에 산다는 뜻에서 백하白下라는 별호別號를 사용하였다. 아버지 김진린은 의성김씨 30세로 내앞마을 입향조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둘째아들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의 후손이다. 김진린은 1825년 김헌수金憲壽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인 김억수金億壽에게 출계하였다. 그는 1886년 3월 17일 금부도사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이 집을 ‘도사댁’이라고 부른다.
도사댁은 사람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으로 세칭世稱 ‘삼천석댁’으로 불릴 정도로 경제력과 학문을 두루 갖춘 집안이었다. 당대의 가세를 입증할 만한 호구단자 4점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김진린이 43세(김대락 23세)되던 해의 호구단자를 살펴보면, 솔거와 외거노비 30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노비들은 일직ㆍ선산ㆍ풍기ㆍ순흥에 거주하였다. 이로 보아 이 지역에도 적지 않은 토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남 3녀 가운데 장자였던 김대락은 김효락金孝洛(1849~1904)ㆍ김소락金紹洛(1851~1929)ㆍ김우락金于洛(1854~1933)ㆍ김정락金呈洛(1857~1881)ㆍ김순락金順洛(1860~1937)ㆍ김락金洛(1862~1929) 등 남동생과 여동생 각각 셋을 두었다. 김효락은 만식ㆍ제식 두 형제를, 소락은 조식ㆍ홍식ㆍ정식 3형제를 두었다. 이 조카들이 김대락의 망명을 도왔고 망명 뒤에도 그를 따라 서간도에서 활동하였다. 또 화식ㆍ문식ㆍ영식 등의 종질(당질)들도 많았는데 이들도 만주로 망명하여 김대락을 도왔다.
김대락은 일생동안 두 사람의 부인을 맞아, 그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첫 부인은 여강이씨 회재 이언적의 후손으로 부친은 이선구李選久이다. 김대락의 정확한 결혼 시점은 알 수 없으나 19세 되던 1864년 맏아들 김명식金明植이 태어난 것을 보면 10대 후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첫 부인은 맏아들이 태어나던 1864년 10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그 뒤 김대락은 안동권씨 권병수權秉銖의 후손을 새로운 부인으로 맞았다. 그 사이에서 김형식金衡植과 딸 하나가 태어났다. 김형식이 태어난 것은 1877년이다. 장자가 태어나고 무려 13년 만에 얻은 아들이다. 장자 김명식은 1902년 작고하였고, 딸은 여강이씨 이석정李錫禎에게 출가하였다. 뒷날 김형식은 김대락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손자 창로와 정로, 종손자 문로와 성로成魯 등도 김대락을 따라 망명하였다.
백하 김대락의 수학과정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1899)의 문인이었다는 기록 이외에 그의 행적을 알려주는 연보나 행장이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추정하건대 유년시절 김대락은 조부 김헌수(1803~1869, 자 聖章, 호 百忍齋)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헌수는 20세 되던 1822년부터 정재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안동의 거유들과 교류하던 내앞마을의 대학자였다. 류치명의 문인록 ■■평문제현록坪門諸賢錄■■에 등재된 내앞마을의 인사는 모두 7명이다. 이 가운데 김헌수는 최고령자이자 이른 나이에 정재 문하에 출입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성장기 수학과정에 영향을 준 인물은 숙부 김진기金鎭麒(1830~1917, 자 岡瑞, 호 愚下齋)로 추정된다. 김진기는 도사공 김진린의 실제實弟로 개항기 위정척사운동을 펼쳤던 안동의 대표적인 유림이다. 1876년 일본과의 개항에 직면한 안동 유림들은 척화의 움직임을 보였다. 3월 1일 척화상소斥和上疏를 위한 대유회大儒會를 안동에서 열었고, 이어 산양山陽(현재 문경 산양)에서 도회道會를 열기로 하였다. 이때 김대락의 숙부 김진기는 이만도李晩燾ㆍ류지호柳止鎬ㆍ류기호柳基鎬와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시국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1876년에 진행되던 척화논의는 집단적인 척사운동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위정척사운동을 펼쳤던 김진기는 1895년 의병창의 때에는 형兄 김진린의 상을 당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있자 이를 규탄하는 상소에 앞장섰다. 박주대의 ■■저상일월渚上日月■■에 따르면 1906년 1월 대구부에서 예천으로 훈령이 내려와 창의 즉 상소한 이유를 캐물었는데, 안동출신으로는 하회의 류비승柳秘承(秘書監承)ㆍ귀미의 김욱래金郁來ㆍ천전의 김강서金綱瑞가 명단에 들어 있었다. 세 사람은 을사늑약 후 맨 먼저 통문을 내어 각 읍 유생들에게 궐기를 권유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조사를 받은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김강서가 바로 김진기이다. 류비승은 하회마을의 류도성(1823~1906)이다.
김대락의 학문 활동에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은 바로 김흥락이다. 김흥락은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안동의 대표적인 유림이다. 결론적으로 김대락의 수학과정과 학문 활동에 영향을 준 인물은 류치명의 문하에서 활동하였고, 국권회복운동기에는 의병항쟁과 척사운동을 펼쳤던 인물들이었다.

2. 신학문의 수용과 협동학교의 확장

위정척사운동에 이어 의병항쟁을 주도했던 안동의 유림들 가운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혁신유림革新儒林이 등장하였다. 류인식柳寅植ㆍ김동삼金東三ㆍ이상룡李相龍이 그들이다. 이들은 위정척사에 대한 자기성찰을 통해 구국계몽운동을 지향하였다.
그 출발점에 선 사람이 류인식이다. 류인식은 1904년 무렵부터 당시 국내외정세를 약육강식弱肉强食ㆍ우승열패優勝劣敗의 형국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서구를 발달된 기술과 풍부한 재원, 강력한 병력, 명료한 법률 등을 가진 나라로 판단하였다. 이에 비해 우리는 밖으로 외침의 우려가 있고, 학술이 비루하고, 사기士氣가 부패하였으며, 재원이 고갈되고, 정치가 문란하여 망국으로 향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류인식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신학新學을 통한 인재양성을 제시하였다. 신학이 인륜人倫을 어지럽히고 인심을 무너뜨리는 이단사설異端邪說이 아니며, 신학에서 다루는 지지地志ㆍ역사ㆍ법률ㆍ산술ㆍ농상학ㆍ기화학은 선비들이 당연히 강론해야 할 내용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척사유림이 가장 문제라고 주장하는 체조와 어학 가운데, 어학은 날로 번성하는 국제관계에 대비하여 가장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요목임을 강조하였다. 체조 또한 구학舊學에서 다루던 무예와 다름없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류인식은 신학으로 길러진 선비야말로 나라의 진정한 원기元氣가 될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신학이야말로 선비가 국제사정에 통달하여 나라를 경영하고 어려움을 구제할 진정한 학문이라고 보았다. 또 신학을 통해 배양된 선비야말로 바른 정치를 펼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류인식은 이러한 신학의 유용함이야말로 편협한 구학舊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적의 학문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터하여 류인식은 1907년 안동에 근대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였다.
류인식이 협동학교를 열었다면 협동학교의 확장에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김대락이다. 그가 신학문을 인정하고 수용하기 시작한 때는 정확하지 않다. 김대락은 협동학교 설립 당시 신교육에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학문적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60여 년 그의 생애는 주자학적 질서에 바탕을 둔 안동의 다른 유림들과 다르지 않았다. 비록 1895년 12월 안동의 각 문중이 을미의병으로 봉기할 때, 그해 3월 아버지 김진린이 작고하여 여막을 지키느라 의병 봉기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뒷날 생각을 바꾸어 협동학교를 적극 지원하고 나서자,《황성신문皇城新聞》은 그의 변화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그 보도내용은 지난 날 김대락이 신교육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신교육에 대한 언급조차 꺼렸으며, 신교육을 언급하는 사람이 있으면 큰소리로 질책하고 강하게 비판하던 인물이었다.
김대락이 신학문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것은 1909년 초인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김대락의 일생에 큰 전환을 맞는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매부이자 각별한 사이였던 이상룡이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을 추진하게 된 일이다. 1909년 3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고 지회장 자리를 수락한 이상룡은《대한협회보》를 배부하고, 홍보에 나섰다. 김대락이《대한협회보》를 보게 된 것도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를 읽고 김대락이 남긴 「독대한협회서유감讀大韓協會書有感」에는 거울과 칼, 구슬에 비유하여 비로소 깨달았다는 감탄의 내용이 담겨있다. 그런데 그 거울과 칼과 구슬이 개화파들의 논리처럼 밖에서 수입한 것이 아니라 때가 끼어 묻혀 있었을 뿐 본래 우리 모습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김대락이 대한협회의 계몽운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긍정의 실마리는 여전히 우리 모습에 대한 자각이었다. 즉 그는 「독대한협회서유감」을 쓸 당시만 하더라도 서구의 학문과 사상을 수용해야한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런데 늦어도 1909년 5월 무렵에는 ≪황성신문≫을 통해 그가 협동학교를 적극 지원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문에는 김대락이 50여 칸의 집을 내놓고, 자신은 작은 집으로 옮겨갔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는 새로운 시대인식과 더불어 협동학교 교육을 확장하려는 뜻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황성신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김대락은 구학문의 대가大家로 수구를 지향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내가 신교육에 대하여 그 시무時務에 필요됨을 일찍 깨닫지 못한 것이 큰 한恨이라. 이제 비로소 깨달았으니 어찌 헌신적 의무를 다하지 않으리오.”라고 하면서 신교육 확산에 힘을 쏟기 시작하였다. 즉 김대락의 변화는 시대의 흐름에 적합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자기성찰의 산물이었다. 그의 신학문 수용과 그에 따른 실천은 당시 안동은 물론 영남에도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황성신문≫은 그의 변화를 ‘교남교육계의 신적치新赤幟’로 표현하였다.

3. 망국亡國에 대한 인식과 만주망명

안동인들은 국권이 무너지기 시작하던 순간부터 줄기차게 항쟁을 벌였다. 그 길과 방법은 다양했지만 목표는 국권회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나라는 무너지고 말았다. 1904년 류인식을 시작으로 척사유림과 혁신유림으로 서로 다른 길을 모색했던 안동의 유림들은 국망의 순간에도 각기 다른 현실인식과 실천을 보였다. 척사유림들은 자진自盡의 길을 갔고, 혁신유림은 만주망명을 선택하였다.
위정척사운동에 이어 의병항쟁과 을사오적참乙巳五賊斬 상소운동을 펼쳤던 척사유림 이만도ㆍ이중언 등이 자진을 선택한 대표적 인물이다. 이만도는 국망과 더불어 자신은 더 이상 ‘소용所用’될 바 없는 존재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에 직면해 ‘소용’될 바 없는 자신을 없애는 길만이 온전한 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는 신하된 자로 ‘적의 백성’으로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철저한 의리론적義理論的 대응이자, 동시에 잠시나마 관직에 머물렀던 사람 즉 대부大夫로서의 책임의식 때문이었다. 이는 유가의 출처관出處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만도의 뒤를 이어 자진을 결행한 이중언 역시 관직에 있었던 사람으로 살아 ‘소용所用’될 바가 없는 세상에 사느니 죽어 의리를 지키겠다는 의리론義理論에 입각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였다.
1910년 나라의 멸망은 김대락에게도 일대 전환이 되었다. 자진과 장례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김대락은 자신의 길을 결정해야 했다. 김대락은 「경술순국제현약기庚戌殉國諸賢?記」에 이만도(하계)ㆍ이중언(하계)ㆍ이현섭(풍산)ㆍ류도발(하회)ㆍ이석주(봉화, 이면주) 다섯 사람의 순국 사실을 기록하였다. 향내 유림들의 자결순국은 김대락에게 상당한 압박이었을 것이다. 특히 향산 이만도의 단식자결은 더욱 충격이었다. 이만도의 아들 이중업李中業이 바로 그의 매부였기 때문이다.
척사유림들이 의리론과 출처관에 입각하여 자진의 길을 가는 한편에서는 만주 독립군기지 건설론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협동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서울의 신민회 인사 이관직 등은 나라가 망하기 전인 1910년 5월 청도회의靑島會議 등을 통해 해외망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관직을 비롯한 서울의 교원들을 통해, 또 신민회에 가입했던 김동삼을 통해 내앞마을에도 망명계획이 전달되고 있었다. 그리고 주진수朱鎭洙ㆍ황만영黃萬英이 이상룡에게 신민회의 망명계획을 알리며 망명자 모집을 이야기 하였다.
척사유림에서 혁신유림으로 전환했던 이상룡은 이 무렵 갈 길을 놓고 고뇌하였다. 망명일지인 「서사록西徙錄」에는 망명을 선택하기까지의 고뇌가 잘 담겨 있다. 이상룡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가야산 기병과 대한협회 안동지회가 실패하고 나라가 망한 지금 다만 결행하지 못한 것이 죽음이라고 토로하였다. 그러나 이상룡은 자진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는 어떤 경우라도 ‘바른 길을 택하는 것’이 유가의 근본임을 알고 있으나 그 ‘바른길’이 곧 ‘죽음’이라는 확신이 서질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상룡은 “백번 꺾여도 좌절하지 않을 뜻으로 단군성조의 영토, 고구려 강역 만주로 옮겨가 독립운동을 펴겠다.”는 단안을 내렸다.
이상룡이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와 희망을 품고 만주행을 선택했다면, 김대락의 망명은 이상룡에 비해 자정自靖과 은둔적隱遁的 색채가 짙다. 김대락이 망명지 만주에서 기록한 「분통가」와 「공리회취지서」에는 망국에 대한 인식과 만주망명을 선택한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김대락은 망국의 상황을 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라는 세계사적 시각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일본’이라는 ‘적국’의 압제로 여겼다. 이러한 인식아래 그는 전통의 출처관에 입각하여 대부大夫의 길이 아닌 사士의 길을 선택하였다. 김대락은 유가의 출처관에 입각하여 “대부가 아닌 선비로서 죽음은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어 사士의 길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자정ㆍ은둔의 성격이 강한 망명을 선택하였고, 망명지를 백두산 아래 서간도로 결정하였다. 김대락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단군의 개국지요, 고구려의 창업지였기 때문이다. 즉 그의 망명에는 자정적ㆍ은둔적 성격과 민족의식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에 신민회의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은 기폭제가 되었다.

4. ■■백하일기■■와 그 사료적 가치

김대락은 망명길에 오르면서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는 1911년 1월 6일 서울을 떠날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1913년 12월 31일까지 만 3년의 일을 날짜별로 기록하였다. 그 일기에 1911년 「서정록西征錄」, 1912년 「임자록壬子錄」, 1913년 「계축록癸丑錄」이라는 표제를 붙였다. 그런데 김대락은 1912년 「임자록」을 쓰면서 자신의 일기를 「보망록補忘錄」이라고 하였다. 학계에서는 이를 통틀어 ■■백하일기■■라 부른다.
김대락은 1912년 정월 1일 「보망록자서」에 일기를 쓰게 된 동기를 밝혔다. 평소에 건망증이 있어 말 그대로 보망을 위해 일기를 쓴다고 하였다. “일기인데 보망이라고 한 것은, 보망거리를 엮어 달과 날짜 아래 매달았기 때문이요. 도만渡滿 기록인데 ‘일록’이라고 한 것은, 길에서 시작된 일이므로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까 대비하는 것이다. 이에 출발하던 날부터 날마다 기록하여 크건 작건 빠뜨리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드러나듯이 김대락은 스스로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일기를 썼다.
더불어 뒷사람이 당시 상황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소망도 담았다. “한 번 서쪽으로 건너온 뒤로는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가 끊어져 부자형제가 흩어지고, 먹고 사는 일에 눈이 어두워 천지天地의 자리가 바뀌었다. 당여黨與가 끊기고 이웃이 달라 해괴하고 놀랍지 않은 것이 없고, 이목이 닿는 곳마다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다. 만일 소홀히 지나쳐 버리고 또 이미 지나간 전철을 밟는다면, 때가 바뀌고 일이 지난 뒤에는 마치 모래바람에 기러기 발자국이 흩어지듯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누가 지금의 풍조를 알겠으며, 또 우리가 오늘 겪고 있는 곤액이 어떠한지를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작자의 바람처럼 ■■백하일기■■는 만주망명 한인들의 정착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억을 제공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망명 초기의 생활과 활동을 당일에 기록한 것은 ■■백하일기■■ 뿐이다. 이는 만주 한인 생활사와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백하일기■■가 지니는 사료적 가치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대락은 망명하여 항도촌에 약 4개월을 머문 뒤 세 번 주거지를 옮겼다. 이를 주거지별로 구분하면 다음 네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1910. 12. 24 ~ 1911. 4. 18) : 안동을 떠나 서울-의주-신의주-
안동(현재 단동)-항도촌-삼원포 입주까지
제2기 (1911. 4. 19 ~ 1912. 2. 7) : 유하현 삼원포 이도구 정착시기
제3기 (1912. 2. 8 ~ 1913. 2. 18) : 통하현 합니하 이주시기
제4기 (1913. 2. 19 ~ 1913. 12. 30) : 유하현 삼원포 남산촌 이주시기

이 시기 만주지역 독립운동가의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동포사회의 사회ㆍ경제적 안정화를 도모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자치기구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민족교육기관 설치와 교육활동을 통해 독립군을 기르는 것이었다. ■■백하일기■■는 이와 관련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 또한 회고록이 아닌 그날 그날의 일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백하일기■■에는 이주 한인들의 사소한 현실이 잘 드러난다. 이는 만주지역 한인 생활사와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낯선 기후와 토질로 인해 겪게 되는 경작과정과 정착의 어려움, 중국인들과의 관계 등이 잘 드러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풍속을 따르고, 청에 입적入籍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음이 ■■백하일기■■ 곳곳에 보인다. 또한 매일의 날씨와 제사, 꿈, 음식관계, 물가, 가족의 안녕과 약 처방 등을 하나하나 기록하였다. 이는 이주 한인들의 생활상을 그려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는 작자의 세밀함과 자상함이 빚어낸 결과이다. 김대락은 물가와 음식, 주거, 가족의 건강 등을 기록하면서 가족의 안위를 염려하였다. 자상한 남성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며, 이는 ■■백하일기■■가 갖는 백미 가운데 하나이다.
또 독립운동의 바탕이 될 자치기구 경학사耕學社와 관련된 기록도 보인다. 경학사가 언제 조직되었는지에 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11년 6월 22일 추가가의사회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학계에서는 이를 경학사 조직 시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명확한 조직 시점은 알 수 없지만 1912년 11월 19일 “경학사耕學社 여러 회원들이 모두 잘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경학사는 음력 1912년 12월 27일까지 존재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무엇보다 ■■백하일기■■는 신흥학교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일기에는 1911년 4월 23일, 이동녕ㆍ장유순이 김대락의 집에 와서 학교 설립에 관한 일을 논의하였다. 이를 통해 김대락의 집에서 학교 건립에 관한 논의가 한차례 있었고, 이동녕과 장유순이 앞장섰음을 알 수 있다. 5월 14일에는 추가가에서 학교가 문을 열었으며, 5월 25일부터는 수업을 시작하였다. 김대락의 손자도 추가가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김대락은 1911년 윤6월 12일에 학생들을 권면하는 「신흥학교학생제군권유문勸諭文」(이하 권유문)을 작성하였다. 신흥학교를 개교하고, 농사를 지으며 직접 학교신축까지 하느라 고생스러운 처지에 있는 학생들의 면학을 독려하는 순한문의 글이다.
이어 유하현 삼원포에 정착하였던 한인 지도자들이 1912년 초부터 통하현 합니하로 이주하면서 합니하에 새로운 학교를 짓는 일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이와 관련된 기록도 보인다. 1912년 2월 말 무렵 학교부지가 확정되었고, 3월부터 터를 닦고 교사 신축에 들어갔다. 그리고 6월 7일에 이르러 합니하의 새 학교 낙성식이 열렸다. 김대락은 이 날의 일을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취지 연설과 축사가 있은 후에 창가와 만세를 불렀으며, 졸업자 7명이 상품을 받았는데 구경 온 수십 명이 이 광경을 보며 칭송하며 부러워했다.”고 하였다.
이와 더불어 ■■백하일기■■에는 1911년에서 1913년 사이 만주를 다녀갔거나 머물렀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김대락은 자신이 방문한 집과 찾아온 사람들을 일일이 기록하였다. 또 누가 망명하였고, 언제 국내로 귀국하였는지, 중국관내나 연해주로 갔는지 등 망명인사들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5. ■■백하일기■■에 드러난 김대락의 인식

■■백하일기■■는 공적 가치와 더불어 사적 가치도 크다. 서간도 망명사회의 최고령자 김대락의 현실인식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기 가운데 「권유문」과 「분통가憤痛歌」, 그리고 「공리회취지서共理會趣旨書」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김대락은 1911년 윤6월 12일에 신흥학교학생제군을 권면하는 「권유문」을 작성하였다. 망명학교를 독립운동학교로 세우려는 「권유문」이다. 소박한 궐기문이 아니라 논리가 정연하다. 자유주의와 진보주의를 앞세우고 서양문명에 패배한 동양의 처지를 솔직히 인정하면서, 우리도 면학으로 그와 같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지·덕·체의 인격 함양과 과학기술·정치학·경제학 등 폭넓은 공부를 강조하면서도 우리의 역사를 거울삼아 부지런히 공부하고 정신을 깨우쳐 국혼國魂을 일으킨다면 ‘신흥학교’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권유문」을 통해 김대락이 또 한 번 사상적 진화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대락은 항도촌에 머물던 1911년 2월 18일 석주 이상룡과 조국 패망의 원인을 논하였다. 이 때 김대락은 ‘정사의 부패와 도덕의 쇠퇴, 기강의 문란과 풍속의 피폐’를 패망의 원인으로 꼽았다. 김대락의 이런 시각에 대하여 이상룡은 “어찌 조국 패망의 원인을 정법ㆍ도덕ㆍ기강ㆍ풍속에만 돌리고 스스로의 임무로 생각하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때까지도 김대락은 여전히 전통적 사고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신흥학교 「권유문」에서는 서양의 문명과 새로운 조류에 대해 ‘사회진화론적’ 시각에 입각하여 강자인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서양을 배우되 나라를 빼앗긴 특수한 상황에서 유가의 정신인 ‘사생취의捨生取義’의 도리정신으로 국혼은 지켜야 한다는 유가儒家의 본질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자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김대락은 서구의 문명에 경도된 나약한 계몽주의자가 아닌 독립전쟁을 표방하였다.
김대락은 합니하에 머물던 1912년 9월 27일부터 「분통가」를 작성하였다. 이 시기는 합니하에서 새롭게 문을 연 신흥학교가 제 모습을 갖추어 갔던 시기이다. 「분통가」 총 400행 가운데 망명지 만주에서의 활동상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은 영웅장사와 의열사를 노래한 부분과 독립전쟁과 광복을 노래한 후반부이다. 여기에서 김대락은 구한말 열사들의 살신성인 모습, 고려 이전 영웅ㆍ장사의 당당했던 이력, 조선시대 의사들이 남긴 교훈을 차례로 열거하면서 민족적 자긍심을 불러 일깨우고 있다. 이 부분은 「분통가」 기록 당시 김대락의 현재적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68세의 노유老儒로서 자신이 직접 전장에서 호령하며 싸울 수는 없지만 청년들에게 우리 민족사에서 위대했던 영웅들이 있었음을 일깨워 자신감을 심어주고, 그 청년들을 통해 조국 광복이 달성되길 희망했던 것이다.
「분통가」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가 지향하였던 독립운동의 방략과 광복 이후의 국가건설에 대한 희망이 드러난다. 우선 그는 민족의식으로 뭉친 청년들이 총궐기하여 독립전쟁을 펼쳐 광복을 달성하기를 희망하였다. 여기에는 김대락만이 아니라 당시 서간도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추구한 무장투쟁 방략이 그대로 녹아있다. 그는 또 독립전쟁을 통해 광복을 맞이하여 요순堯舜세계를 다시 보는 태평성대를 꿈꾸었다. 그는 “헌법정치憲法政治ㆍ공화정치共和政治ㆍ시조지의時措之義 따라가며”라고 하였고, 끝에는 “아무래도 설욕雪辱하여 대한제국大韓帝國 보고 싶다.”라고 맺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김대락은 ‘시조지의’에 따른 새로운 근대사회를 꿈꾸면서도, 구체제에 대한 사고를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하였다는 점이다.
1912년 초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하였던 김대락은 1913년 2월 18일에 다시 삼원포 남산으로 돌아왔다. 1913년 왕삼덕ㆍ김동삼은 새로운 자치조직인 공리회共理會를 만들었다. 공리회의 정확한 결성 시점은 알 수 없으나, 김대락의 일기에는 1913년 6월 7일 「공리회취지서」를 작성한 것으로 적혀있다. 그가 「공리회취지서」를 작성한 사실을 보면, 공리회 회장에 추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공리회취지서」에는 공리회 결성 이유와 시대적 배경, 조직체계와 지향점 등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먼저 김대락은 공리회를 결성한 이유를 밝혀두었다. “1910년 나라가 변고를 당하여 요녕성遼寧省으로 망명 온 것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자취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형세를 돌아보니, 숲에 던져진 토끼와 골짜기로 나아간 물고기처럼 후원자도 없다. 또 떠돌아다닌 나머지 가정에는 기강紀綱이 없고, 사회에서 모욕을 당해도 막을 방책이 없으니, 이대로 가다가는 끝내는 요녕성의 거지가 될 전망이다. 이에 동포사회의 자치기구로 공리의 모임을 결성하여 공동생활을 공고히 유지하는 계획을 삼았노라.”고 하였다. 즉 경학사가 무너지고, 갖가지 생활고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한인들의 공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공리회 결성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다행히 중국이 현재 우호적인 입장이며, 망명인사들도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복장과 어문도 중국어를 사용하여 서로 믿고 의지하고 있다. 또한 천하도 공리共理로 모든 사람이 입으로 화응和應하고 옛날에 물들여진 더러운 습속이 다 유신維新하여 평등의 권리가 천한 사람에까지 미치고, 자유自由의 종소리는 부인과 어린이에까지 미치어, 울타리의 경계도 없으니 공동共同의 생활과 정치에 다시 더할 것이 없다.”는 시대적 배경을 밝혀 놓았다.
세 번째 김대락은 공리회 조직운영의 근간이 되는 지침과 방법을 기술하였다. 그가 제시한 공리회 운영의 근간은 바로 ‘덕德’이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여 성질性質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났으니, 근심과 걱정을 함께 하는 처지에 ‘덕德’으로서 가지런하게 정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공리회의 조직으로 십가장十家長ㆍ백가장百家長ㆍ천가장千家長을 두고 그들 중심의 자치를 도모하였다. 도道에 반대되고 덕德에 어긋나 스스로 공리共理의 정치에 벗어나는 사람이 있으면 십가十家 안에서는 십장十長이 이들을 규찰하며, 백가百家 안에서는 백장百長이 이들을 탄핵하는 자치제도가 그 핵심이었다.
마지막으로 김대락은 ‘공리’가 실현되는 이상사회에 대한 밑그림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바로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이상사회’였다.

나의 어린이를 어린이로 보살피고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며 남의 근심을 근심해 주고 남의 즐거움을 즐거워 해주며 芝草와 蘭草가 냄새를 함께 하고 輔車가 의지하듯 하면 어찌 저들만 못하겠으며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땔나무를 얽어서 만든 자리를 화려한 자리로 여기고 함께 누울 것이고 쓸개를 맛보던 것을 양식으로 삼아 귀한 음식과 함께 달게 먹게 될 것이다. 자제들을 學校에 보내면 장래의 進化를 볼 것이며 남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을 인정해주고 도와주면 자기와 다르다고 하여 사물에 막히지 않을 것이다. 소리를 같이하고 기운을 같이하여 서로 호응하면 안장을 풀고 어깨를 쉴 수 있어 다시 나그네의 괴로움이 없을 것이니 秦 나라에 가든 楚 나라에 가든 어디를 간들 인정을 받지 못하겠는가?

김대락은 ‘공리’라는 자유롭고 평등한 새 사회를 유지하자면 모든 것을 공동共同ㆍ공리共理ㆍ공화共和로 협의 운영하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먼저 한 가정의 공동共同을 생각하고, 다음으로 한 마을의 공동共同, 이어 지방의 공동共同, 천하의 공동共同으로 넓혀갈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경의敬義’와 ‘신의信義’에 바탕을 둔 공동체가 이루어진다면 우연히 이치에 어그러진 일을 만나더라도 서로 구제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공화共和이고 공리共理라고 하였다. 또 경敬과 의義를 함께 유지하면 신信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니, 이 또한 이른바 공화共和의 근본이요, 공리共理의 효험이라고 역설하였다.
김대락은 삼원포의 한인단체였던 경학사가 무너지고, 갖가지 생활고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삼원포 사회에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그리고 그 자치단체는 ‘도와 덕’이 중심이 된 유교적 이상사회이면서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시대상’이 담긴 대동사회였다. 이것이 바로 김대락이 꿈꾸었던 ‘만주망명 한인사회’의 모습이었다.

6. 김대락의 생애와 그 의의

김대락은 1845년 안동에서 세가 좋았던 내앞마을에서 태어나 퇴계학맥을 계승한 정재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한 조부 김헌수ㆍ숙부 김진기ㆍ족숙 김흥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들은 모두 안동의 대유大儒였으며, 특히 김진기는 개항기 안동의 대표적인 위정척사운동가였고, 서산 김흥락은 위정척사사상에 터를 두고 의병항쟁을 이끌어낸 인물이다.
이렇게 김대락은 살림 좋은 집안의 장자로서 집안의 대소사를 돌보며, 구학문으로 일가를 이루며 66년 동안 수구적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의 인생 여정 끝부분은 격변의 시기였고, 깨어있는 지식인으로서 향당의 안정된 삶에만 안주할 수는 없었다. 변화의 바람은 가까이에서 불었다. 1907년 마을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가 설립되었고, 젊은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신학문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처음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던 김대락은 1909년 초 노유老儒로서는 하기 힘든 일대 전환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협동학교의 신교육이야말로 ‘시조지의時措之宜ㆍ시중지도時中之道’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곧 실천으로 연결되어 자신의 집을 협동학교 교실로 제공하고, 협동학교의 확장에 노력하였다. 그의 이러한 변화는 안동의 향중은 물론 영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실로 이는 한 시대의 ‘붉은 깃발’이었다.
김대락은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또 다시 고된 길을 선택하였다. 일가一家를 이끌고 만주 망명길에 나선 것이다. 그의 만주행은 유가적 색채가 짙은 자정적自靖的ㆍ은둔적 성격의 망명길이었다. 일본이 지배하는 조선, 곧 도道가 무너진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자정自靖의 삶을 지향하는 의리론적義理論的 대응이었다. 그러나 김대락은 망명 후 한 차례 더 사상적 진화를 보여주었다. 1911년 윤6월 12일에 작성한 신흥학교 「권유문」에서는 사상적으로 한층 진보한 김대락의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서양의 문명과 새로운 조류에 대해 ‘사회진화론’에 입각하여 강자인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서양을 배우되 나라를 빼앗긴 특수한 상황에서 유가의 정신인 ‘사생취의捨生取義’의 도리정신으로 국혼은 지켜야 한다는 유가儒家로서의 본질적 취지는 변함없이 고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1913년 「공리회취지서」에도 일관되게 흐른다. 김대락은 경학사가 무너지고, 갖가지 생활고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삼원포 한인사회에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공리회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김대락이 지향했던 자치단체는 ‘도와 덕’이 중심이 된 유교적 이상사회이면서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시대관이 담긴 대동사회였다. 이것이 바로 김대락이 꿈꾸었던 ‘만주망명 한인사회’의 모습이었다.
즉 김대락이 생애 말기인 1909년부터 1914년까지 전개하였던 민족운동은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한인자치단체를 조직하여 독립군기지 건설의 텃밭이 되도록 지도하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저에 흐르는 인식은 공화주의를 지향하면서 전통적 가치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즉 변화하는 역사의 새로운 기운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도, 그 축은 여전히 전통적인 가치관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기본정보

상품정보
ISBN 9788949908236
발행(출시)일자 2011년 11월 10일
쪽수 505쪽
크기
210 * 297 * 35 mm
총권수 1권
시리즈명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자료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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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득공제 안내

  • 도서 소득공제란?

    • 2018년 7월 1일 부터 근로소득자가 신용카드 등으로 도서구입 및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사용한 금액이 추가 공제됩니다. (추가 공제한도 100만원까지 인정)
      • 총 급여 7,000만 원 이하 근로소득자 중 신용카드, 직불카드 등 사용액이 총급여의 25%가 넘는 사람에게 적용
      • 현재 ‘신용카드 등 사용금액’의 소득 공제한도는 300만 원이고 신용카드사용액의 공제율은 15%이지만, 도서·공연 사용분은 추가로 100만 원의 소득 공제한도가 인정되고 공제율은 30%로 적용
      • 시행시기 이후 도서·공연 사용액에 대해서는 “2018년 귀속 근로소득 연말 정산”시기(19.1.15~)에 국세청 홈택스 연말정산간소화 서비스 제공
  • 도서 소득공제 대상

    • 도서(내서,외서,해외주문도서), eBook(구매)
    • 도서 소득공제 대상 상품에 수반되는 국내 배송비 (해외 배송비 제외)
      • 제외상품 : 잡지 등 정기 간행물, 음반, DVD, 기프트, eBook(대여,학술논문), 사은품, 선물포장, 책 그리고 꽃
      • 상품정보의 “소득공제” 표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도서 소득공제 가능 결제수단

    • 카드결제 : 신용카드(개인카드에 한함)
    • 현금결제 : 예치금, 교보e캐시(충전에한함), 해피머니상품권, 컬쳐캐쉬, 기프트 카드, 실시간계좌이체, 온라인입금
    • 간편결제 : 교보페이, 네이버페이, 삼성페이, 카카오페이, PAYCO, 토스, CHAI
      • 현금결제는 현금영수증을 개인소득공제용으로 신청 시에만 도서 소득공제 됩니다.
      • 교보e캐시 도서 소득공제 금액은 교보eBook > e캐시 > 충전/사용내역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 SKpay, 휴대폰 결제, 교보캐시는 도서 소득공제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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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상상품+제외상품을 주문하여 신용카드 "2회 결제하기"를 선택 한 경우, 부분취소/반품 시 예치금으로 환원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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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서 소득공제 불가 안내

    • 법인카드로 결제 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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