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한국학연구총서 161 |
[2019 세종도서 우수학술도서] 신라 왕경 형성과정 연구
이동주 저
2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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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문화사
종이 표지
152*224mm(A5신)
340쪽
2019년 1월 17일
9788949947907
책 소개
이 책은 나의 학위논문인「신라 통일기 왕경의 구조와 운영」을 토대로 수정, 보완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문헌이 바탕이 되면서도 물질자료로 왕경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러기 위해 왕경에서 이루어진 발굴 자료를 모두 정리해 보았다. 발굴 정황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언급함으로써 왕경의 대체적인 경관이 드러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보고된 자료의 대부분이 시기적으로 통일기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글의 중심은 통일기로 잡으면서 전야에 해당되는 중고기의 왕경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Ⅱ장 통일기 이전 왕경의 정비에서는 중고기 왕경의 경관을 살펴보았다. 왕경은 진한의 소국인 사로국이 중앙집권적인 영역 국가로 탈바꿈하면서 전환된 것이다. 특히 왕경의 외적 변화를 초래한 요인으로 마립간호의 사용, 불교 공인, 유학, 당 문물의 수용, 무열왕계의 집권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자비마립간의 방리명 제정은 공고한 6부 지배질서에 인위적인 균열을 가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왕경의 외형 변화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라의 성장은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이는 역으로 그간 국가의 운영체제를 고구려로부터 습득하였음을 웅변한다. 중고기 평지성-산성의 이원적 운영은 바로 그 산물이다. 진흥왕대 황룡사의 창건은 평지의 왕경 편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리고 진평왕대 남산신성의 축조는 왕경 운영 시스템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고구려와 관계가 결렬되면서 전시체제에 준하게 운영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 관제는 진평왕대 크게 정비되는데 이는 왕궁인 월성의 외형 변화를 야기한다. 어쩌면 해자의 매립이 통일기 이전으로 상회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Ⅲ장 통일기 왕경의 변화에서는 문무왕의 왕경 개조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김춘추가 집권하자 당 문물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다. 국정운영도 중고기 왕실의 佛家族신앙에서 유학적 정치질서로 전향하였다. 진지왕의 후손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 상고의 신화적 인물에게 왕실 계보를 연결시켰다. 율령, 묘호제, 시호제, 동궁제, 오묘제, 국학 등은 당 문물의 소산이다. 왕경은 남면한 권위건축물을 세워 경관을 돋보이게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월성은 남측이 하안단구이고, 도시의 확장 방향은 북쪽이었다. 문무왕은 이러한 지형적 한계를 최대한 활용하는 선에서 왕경을 정비하였다. 당시 왕경의 토목공사를 증언하는 물질자료가 바로 儀鳳四年皆土이다. 여기서 개토는 납음으로 연월일이 모두 토이며, 구체적으로 679년 5월 7, 8, 29일에 해당한다. 왕경 정비에 조응하여 길일을 택한 것이다. 월성의 인근에 권위건축물들이 세워지면서 경관은 이전보다 훨씬 달라졌다. 그리고 가로구획을 위한 도로가 사방으로 축조되기 시작한다. 바둑판식이라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S자, /자, ㄣ자형 등 꽤 다양한 형태로 검출되었다. 신라 왕경은 한 번도 천도를 한 적이 없었다. 이는 결국 누대에 걸쳐 중첩된 인공물로 인해 방형의 토지구획이 실현되기 어려웠음을 시사한다. 이에 반해 외곽의 모량리 도시유적은 인공물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진행된 것이다. 이곳에서 확인된 방리가 시내와 달리 바둑판식을 이루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Ⅳ장 통일기 왕경의 구조에는 정비된 공간의 양상을 분석해 보았다. 왕경을 현재의 경주시내로 보는 경우가 있다. 실제『삼국사기』지리지에는 왕도의 범위가 적기 되어 있고, 그 범위가 경주시내와 거의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의 서문은 본문과 층위를 달리한다. 가령 신라본기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만월성, 신월성 등의 용어가 보인다든지, 왕성에서 상주의 위치를 착각하는 초보적인 실수가 확인된다. 이는 객관적인 정보로만 나열된 본문과는 차별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지의 서문은 편찬
자의 역사 지리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편찬자는 번화가를 왕도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왕경은 번화가와 그 외곽을 둘러싼 왕기로 인식된 공간까지를 아우르는 범위이다. 외곽에는 수공업 공방 등 특수 촌락을 편제하여 왕경인들의 삶을 서포터 하였다. 제한된 범위에 인간들이 집주되자 위성도시의 개념으로 외곽을 개발하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신문왕은 달구벌에 중국식 도성제를 실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달구벌은 왕경에 비해 도시화의 진전이 더뎠고, 공간의 범위는 훨씬 광활하였다. 그러나 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중대의 왕들은 왕경을 최대한 활용하는 선에서 자신들의 이상을 펼쳤다.
목차
책머리에

Ⅰ. 머리말
1. 연구 동향과 목적
2. 연구 내용과 방법

Ⅱ. 통일기 이전 왕경의 정비
1. 왕경의 성립
1) 방리명 제정의 의미
2) 평지성-산성의 이원구조
2. 중고기 왕경의 정비
1) 궁성과 도시의 재정비
2) 황룡사와 도시 계획
3) 왕성 운영 체제의 변동

Ⅲ. 통일기 왕경의 변화
1. 당 문화의 수용과 왕경의 정비
1) 당 문물의 수용
2) 유학 중심의 정치 지향
2. 문무왕의 왕경 개조
1) 왕경 개조와 택일
2) 왕궁의 확대 정비
3. 왕경의 변화
1) 권위 건축물의 증가
2) 시가지의 확대와 도로의 정비

Ⅳ. 통일기 왕경의 구조
1. 왕경의 시가지
1) 공간 구조와 방리의 구획
2) 수공업 공방의 운영 양상
2. 왕경의 배후지
1) 도시화의 진전
2) 특수 촌락의 편제

Ⅴ. 맺음말

부표
참고문헌
저: 이동주
1976년 경상북도 영천 출생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졸업(문학사, 문화재학 전공)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과정 졸업(문학석사, 한국고대사 전공)
경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한국고대사 전공)
(현) 경북대학교 사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