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한국학연구총서 163 |
안용복과‘죽도일건(竹島一件)’
김호동 저
4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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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
경인문화사
종이 표지
152*224mm(A5신)
778쪽
2019년 4월 30일
9788949948034
책 소개
우리나라에서 안용복을 숙종 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일본 막부정부가 자인하도록 활약한 ‘민간 외교가’라고 하거나, 흔히들 ‘장군’으로 부른다. 1954년 부산의 애국단체인 大東文敎會에서 ‘독전왕 안용복 장군’으로 추존식을 거행한 것이 안용복을 장군으로 칭하게 된 계기이다. 부산 수영사적공원에 안용복을 모시는 사당인 ‘守彊祠’가 있고, 그 앞에 ‘安龍福 將軍 像’이 있다. 울릉도 독도박물관 앞에 ‘안용복장군충혼비’가 있다. 그 때문에 흔히들 ‘안용복’을 ‘장군’으로 인식한다. 그렇지만 일본의 자료인 󰡔竹島考󰡕에 실려 있는 안용복 호패에는 ‘私奴’로 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안용복’을 독도를 지키는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반면, 일본의 경우 연구자들도 ‘안용복’을 ‘허구와 과장으로 꽉 차 있다.’라고 한다. 지금의 경우, 한일 양국에서 ‘안용복’에 치중하여 연구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들 안용복을 독도를 지킨 인물로 치켜세우면서, ‘장군’, 혹은 ‘민간 외교가’로 부르며 영웅시한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되어 있다. 어느 개인의 능력이나 심리상태가 역사적 사실의 중요 원인으로 부각되면 역사가 우연의 소산물로 이해되거나 영웅주의 역사관에 빠질 위험이 있다.
안용복이 살았던 시대는 17세기 소빙기로 인한 대재난의 절정시기이다. 대재난에 빠진 조선의 동남해연안민들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울릉도・독도에 많이 들어갔다. 그 일원 가운데 ‘안용복’과 ‘박어둔’이 일본 오야가의 어부들에 의해 납치되었다. 그것으로 인해 조선 조정-동래부와 일본 에도 막부-쓰시마 번에서 ‘鬱陵島爭界(竹島一件)’가 발생하였다. ‘안용복 납치사건’으로 인해 조선 조정은 우리나라 동남해연안민들이 울릉도와 독도에 드나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 어부들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적극적으로 일본 에도 막부-쓰시마 번과의 외교 교섭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를 지킬 수 있었다. 민초들의 적극적 삶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조정은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낼 수 있었다.
‘안용복’을 강조하기 보다는 ‘鬱陵島爭界(竹島一件)’를 강조해야 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 외교전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을 부각하여야 한다. 이 저술에는 안용복 납치사건으로 인해 국가와 국가 사이에 ‘鬱陵島爭界’가 일어나 외교전을 통해 동해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한국 측 사료에 근거하여 ‘안용복 상’을 그려낸다 하더라도 일본을 설득시킬 수 없다. 이제 그들이 금과옥조로 신빙하는 일본 사료들을 통해 새로운 ‘안용복 상’을 그려낼 필요성이 있다. 일본 사료들과 한국 사료들을 국제적 시각, 객관적으로 비교할 필요가 있다.
󰡔竹島考󰡕 上, 「或問」의 경우, “일본의 지명조차도 조선국에서 가까운 곳은 그처럼 호칭하였다. 그러니 竹島에 한해서 자기의 관할지를 일본식으로 읽을 이유가 없다.”라고 하여, ‘다케시마’・‘마쓰시마’의 경우 한자로 ‘竹島’, 혹은 ‘竹嶋’ 및 ‘松島’ 혹은 ‘松嶋’를 쓰고 있다. 그 때문에 일본의 홍보를 싫어하므로 ‘竹島’, 혹은 ‘竹嶋’ 및 ‘松島’, ‘松嶋’라고 쓴다.
목차
책을 내면서


제1편 머리말

제2편 ‘안용복’과 ‘鬱陵島爭界(竹島一件)’ 관련 사료 현황

제3편안용복과 ‘鬱陵島爭界(竹島一件)’에 대한 한국 정부 및 일본 정부의 견해
제1장 안용복과 ‘鬱陵島爭界’에 대한 한국 정부 및 일본 정부의 견해
제2장 안용복과 관련한 용어 사용 문제

제4편 17세기 울릉도・독도 산물

제5편 안용복이 살았던 시대
제1장고대~조선시대 ‘鬱陵島爭界’ 전후 시기까지의 울릉도・독도에 간 사람들
제2장 안용복이 살았던 시대 : 소빙기로 인한 대재난의 절정기
제3장 일본 오야・무라카와 양 가문들의 어부들이 울릉도에 간 까닭?
제4장 조선인들은 1692년에 울릉도에 처음 왔을까?

제6편 안용복은 누구인가?

제7편 1693년에 일본 오야가의 어부들, 안용복・박어둔 납치사건
제1장 오야・무라카와 양 가문 ‘竹島渡海 免許’의 과정
제2장 1692년, 울릉도에서 조선인들과 무라카와 가문의 어부들의 첫 충돌
제3장 1693년, 안용복의 울릉도 행과 일본에서의 안용복 행적
제4장 안용복은 에도(江戶)에 갔을까?

제8편 ‘鬱陵島爭界(竹島一件)’의 교섭
제1장 ‘鬱陵島爭界’ 1차 교섭
제2장 ‘鬱陵島爭界’ 2차 교섭
제3장 서계의 존재 유무

제9편 󰡔竹嶋紀事󰡕에 나오는 ‘于山島’

제10편 에도 막부에 의한 ‘竹島渡海禁止令’의 결정

제11편 안용복 1차 처벌

제12편 1696년, 안용복 일행의 울릉도・독도행 및 일본의 행적
제1장 안용복 일행의 울릉도・독도 도해
제2장 안용복의 일본 행

제13편 안용복 일행의 2차 처벌

제14편 ‘鬱陵島爭界’ 이후의 조선과 일본의 대응
제1장 삼척첨사 張漢相의 울릉도 수토
제2장 조선의 대응 : 수토제도 확립
제3장 일본의 대응
제4장 ‘竹島渡海禁止令’ 이후의 조선인들이 울릉도・독도에 건너갔을까?
제5장 메이지 정부의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 및 「太政官指令」에의 ‘竹島一件’ 확인

제15편 ‘안용복’ 역사적 사실과 ‘안용복’ 소설
제1장 ‘안용복’의 역사적 사실
제2장 역사적 사실과 ‘안용복’ 소설
제3장 군말

제16편 맺음말


참고문헌

부록
한국의 안용복 관련 사료
저: 김호동
대구 출생
영남대학 문과대학 국사학과
동 대학원 수료 (문학박사)
영남대학 국사학과 객원교수
영남대학 독도연구소 연구교수
영남대학 민족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