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부족국가가 성립한 이래로, 청도지역에 정착했던 사람들도 매우 왕성한 활동을 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지역에 산재한 각종 유적들이나 발굴된 유물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으며, 이는 기후나 토질 같은 여러 조건들이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에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서국이 비록 신라에 병합되어 버렸지만, 그 후예들은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한 채 청도 땅을 지켜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는 토착세력이 워낙 강성하여 중앙에서 파견 된 관리들도 다스리기 어려워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왕사 국사를 이곳에 파견했던 것에서도 청도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다 고려 후기부터의 인구이동 현상에 따라 김해나 밀양 혹은 안동에서 청도로 이주해 왔던 세력들이 새로이 정착해 갔다. 흔히들 조선시대를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시대라 일컫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청도 땅에도 기왕에 정착했던 청도 김씨 외에도 김해 김씨나 밀양 박씨, 고성 이씨 등과 같은 여러 성씨들이 새로 이주해 왔고, 이들이 재지사족으로 훌륭하게 정착하여 고을을 주도하는 형국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임진왜란을 당하자 보국충정의 일념으로 창의의 깃발을 올린 밀양박씨 소고공파의 활약은 우리 의병전쟁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 되었다. 그 일문(一門)에서 무려 11명이 선무원종공신으로 책봉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예들은 퇴계 학맥을 이은 남인(南人) 학자로 활동하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당대 지식인들이 꿈꾸며 노력했던 각종 사회활동을 통하여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과 그의 아들 진계(進溪) 박재형(朴在馨)이 있었다. 청도에 살았던 수많은 선인(先人)들 중에는 그들의 활동들이 잘 알려지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이들 역시 그러한 예에 벗어나지 않는다.
제1편은 조선 초기 밀양박씨 소고공파(嘯皐公派)가 밀양에서 청도로 이주한 이래 각종 정치 사회적 활동을 통하여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서의 위상을 굳혀갔던 부분을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제2편은 한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에 살았던 남인(南人) 학자 박시묵(朴時默)과 그의 아들 박재형(朴在馨)의 현실 인식과 그들의 학문적 성과를 설명한 것이다. 이는 밀양박씨 청도 입향조 소고공 박건(朴乾)으로부터 박시묵 부자가 살았던 시대까지의 개별 문중에 대한 역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