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세사라고 할 때 고려시기만을 대상으로 한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조선을 근세(近世)라는 개념으로 보는 시각에 따른 것이다. 고려의 귀족 사회와 조선의 양반관료제 사회가 엄연히 다른 것이기도 하지만, 통상적으로 시대구분을 크게 하여 고대 중세 근대로 나누는 관점에 따른다면 조선전기까지는 엄연히 중세사로 봐야 할 것 같다. 본서(本書)에서 중세사란 의미는 후자의 관점에 따른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아울러 농경을 위주로 살아왔던 우리 민족들은 대대로 한 지역에서 정착해 왔던 씨족(氏族)집단이 중심이 된 사회였고, 각 지역별로 웅거한 각 씨족들이 중앙 관료를 끊임없이 배출하여 나라를 이끌어왔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성관(姓貫)을 달리하는 약 4천 여 씨족들 중에서 고려와 조선에 걸쳐 끊임없이 중앙 관료를 배출하여 가문의 성세(盛世)를 이어간 경우는 흔하지 않다. 엄격한 신분제를 바탕으로 한 보수적인 사회였다 할지라도 대대로 고급 관인을 배출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고, 이는 곧 한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듯이, 한 가문에 있어서도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본서(本書)에서 다루었던 고성이씨 가문을 공부하다 보면, 예외도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필자가 조선시대 선비 정신에 대한 제반 문제들을 연구하고 자료를 정리하면서 시작한 것이 사관(史官)에 대한 저술이었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사관(史官)들의 모습은 국왕이 정사를 펼칠 때 그 지근거리 양쪽에 앉아 기록하는 것을 연상하곤 한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갖추어지기까지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전각(殿閣) 밖의 잘 들리지도 않을 계단에서 기록하던 사관들의 불편함이 해소되는 데에는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도 개선을 위한 신하들의 노력 또한 죽음까지 불사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진드기같이 따라다니는 사관들을 물리치려는 태종 이방원에게 “하늘 위에 사관이 있소이다”라고 항변했겠는가? 이런 과정을 거쳐 조선시대 사관(史官) 제도가 정비되어 갔고, 종국에는 우리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사관의 모습들이 정착해 나갔던 것이다. 이렇듯 사관제도가 정착해 간 그 이면에는 대를 이은 고성이씨 인물들의 노력 때문이었고, 이를 발견한 필자는 무언가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신비감마저 들기도 했다. 태종 때 용헌공 이원(李原)의 공으로 사관들이 종이와 붓을 들고 전각(殿閣)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의 증손자 이주(李冑)의 노력으로 성종 20년에 비로소 임금 좌우에 각 1명씩 입시하여 앉아서 기록하는 관례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어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 같은 언론기구들에 관심을 넓히면서 더 많은 인물들과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그 칼날 같았던 올곧은 선비 정신에 매료되어 연구 영역을 넓히는 과정에서 유독 고성이씨 인물들과 접했던 시간이 많았음도 우연은 아니었다. 정통의 왕위 승계권자가 아니었던 성종에게 서슴없이 이 문제까지 건드리며 직간(直諫)을 아끼지 않았던 이칙(李則)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진정한 신하였고, 연산군 시절 올곧은 선비정신을 간직한 채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려졌던 망헌(忘軒) 이주(李冑)는 참다운 신하였다. 그밖에 일일이 거론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고성이씨 가문의 인물들을 탐닉하면서 필자는 그야말로 즐거운 타임캡슐 여행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