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한일관계연구총서 69 |
北島万次, 임진왜란연구의 재조명
김문자, 손승철(孫承喆) 엮음
32,000원
32,000원
판매중
경인문화사
종이 표지
152*224mm(A5신)
458쪽
2019년 10월 18일
9788949948447
책 소개
명나라를 정복하고 동아시아 세계군림의 야망을 품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그 첫 단계로 1592년에 조선에 군사를 이끌고 일으킨 임진왜란은 1598년 히데요시의 사망에 의해 그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전후 7년간에 걸친 전쟁은 이후의 중국 조선 일본의 역사에 나름의 후유증을 남겼다.

중국의 경우, 명조가 붕괴하고, 명나라로부터 미개인 즉 이적(夷狄)으로 멸시 당했던 여진(女眞)이 청나라를 수립한 것이다. 임진왜란 후, 명나라는 국가 재정이 궁핍하여 재정난을 인민에 대한 증세로 극복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명나라 조정에 대한 인민의 불만이 축적되어 갔다. 한편 여진 지역에서는 1613년, 건주위(建州衛)의 여진 누르하치가 바다 서쪽 여진오랍(女眞烏拉)을 멸하고 여진족을 통일했다. 그리고 1616년, 누르하치는 한위(汗位)에 올라가고, 국호를 후금(後金)으로 정하고, 천명(天命)이라고 건원(建元)하였다. 이어 1618년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선전포고하고, 명나라가 건주여진(建州女眞) 통제의 거점으로 하고 있던 무순위(撫順衛)를 함락시켰다. 이에 대해 명나라는 후금 공격에 나섰지만, 1619년 누르하치는 살리호 전투에서 명군에 대승했다. 이후 1625년 후금은 도읍을 심양에 옮겨 이듬해 1636년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청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먼저 지적했던 명나라 조정의 증세에 대한 불만은 1644년, 은천(銀川)의 역부였던 이자성(李自成)이 농민반란군을 이끌고 북경을 함락시키고, 명나라 황제 숭정(崇禎)이 자해하므로 명나라는 멸망했다. 이후 청나라는 숭정황제의 신하인 오삼계(吳三桂)가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을 뒤쫓아, 북경을 빼앗은 것이다. 여기에 화이변태(華夷變態: 중화가 夷狄로 모양을 바꿈)라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조선의 경우, 중국과의 관계로 말하면, 조선은 종주국으로 명나라에 대해 사대(세력의 막강한 자에 종속함, 신분의 존비의 예, 상하 질서를 분명히 함)를 다하여 명나라의 종속국이 되어있었다. 누르하치가 명나라에 선전포고했을 무렵, 명나라 병부(兵部)는 조선에 후금과 싸우기 위한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1619년 조선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 휘하의 조선군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동로군(東路軍)과 합류했다. 그러나 그 직후, 살리호 전투에서 명군은 대패하여, 강홍립 등 후금군에게 연행되어 항복한다. 한편 조선국내에 눈을 돌리던 1623년, 서인파(西人派)가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가 즉위했다. 여기서 서인파는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1624년, 전년의 정변(政變)에서 활약한 평안도 병사 이괄(李适)이 논공(論功)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한성(漢城)을 점령했다. 훗날, 이 반란은 진압되지만, 반란군의 일부가 후금으로 피해, 인조 즉위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1627년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침입했다. 여기서 국왕은 서울을 떠나 강화도로 도망갔지만, 결국 조선은 후금에 굴복하고, 후금과 조선의 형제 관계 체결 후에 군신관계가 된다. 조선은 명나라 연호(天啓)를 사용하지 않고, 후금의 연호(天聡)를 사용하는 것 등을 조건으로 화해했다. 이후 후금은 조선에 형제 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조선 측의 방침은 배금(拜金)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1636년, 다시 청군은 조선에 침입하여, 조선 국왕은 항복하고, 명과의 단행, 청나라에 대한 신례(臣禮) 등을 맹세하고, 여기에 청과 조선은 사대 종속관계에 의해 맺어지게 된다. 그 후 조선 국내에서는 중소양반 계층이 속출하는 등, 신분제의 이완도 보이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 우선 첫째로 둘 수 있는 것은, 토요토미 정권의 멸망과 에도 막부의 성립이다. 그 과정은 1600년,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쪽 동군이 이시다 마츠나리(石田三成) 쪽 서군에 승리하고, 1603년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고 에도 막부가 성립, 그리고 1614년부터 이듬해 1615년, 오사카 겨울진 여름진에 의한 토요토미(豊臣) 씨의 멸망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두 번째로는 명나라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도모한 것이다. 우선 이에야스의 대 명나라 국교회복 협상을 보면, 이에야스는 중국인 통역자 풍륙(馮六)을 나가사키(長崎)에 배치하고, 대만 류큐 조선 등에서 명 나라와이 무역을 계획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않았다. 곧 중국에서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발흥하므로 일본과 중국 간의 국교는 끊어져 버렸다. 다음으로 이에야스의 대 조선 교섭을 보면, 임진왜란 종결 이듬해 1599년, 이에야스는 소우 요시토시(宗義智)에게 조선과의 화의 교섭을 명령하고, 조선 침략 당시 연행한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고, 국교 회복을 교섭을 기대했다. 그 후 1605년, 이에야스는 조선의 승려 유정을 통해 국교 회복 교섭을 기대했다. 그 후 1605년, 이에야스는 조선의 승려 유정(惟政)과 손문욱(孫文彧)을 후시미 성에서 접견하고, 가신 혼다 마사노무(本多正信)와 오산(五山)의 고승 세이쇼우 죠우타이(西笑承兌)에게 명하여 그들과 화의를 협의하게 했다. 이 결과 1607년, 조선에서 려우길(呂祐吉) 경섬(慶暹) 정호관(丁好寬) 세 사자가 회답 겸 쇄환사로 에도 성을 방문하여 장군 히데타다(秀忠)를 만났다. 그 후 1811년까지 장군이 바뀔 때마다 우호 선린을 목적으로 한 조선 통신사가 12회에 걸쳐 에도에 찾아오게 되었고, 여기에는 쓰시마(對馬)번의 무사가 동행했다. 또한 1609년, 宗씨와 조선과의 사이에 조약(己酉조약)이 체결되어, 宗씨가 매년 20척의 무역선을 조선에 내는 것 등이 결정되고, 宗씨의 대 조선 무역이 회복했다. 한편, 조선에서의 통신사 파견에 대해서, 일본 측에서도 조선 국왕의 즉위를 경축하는 사절이 조선으로 갔으나, 조선 측에서는 일본 재침의 위험을 고려하여 사절을 부산의 왜관(倭館)에 머무르게 하고, 서울에 상경시키지 않았다.
세 번째로는 에도 막부가 채택한 쇄국 체제이다. 쇄국은 일본인의 해외왕래 금지 기독교 금압 무역 통제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 경우, 쓰시마(對馬)를 매개로 한 대 조선 관계 이외에, 나가사키에서는 네덜란드 및 중국인 상인 관계, 사츠마(薩摩)를 매개로 한 대 류큐(琉球) 관계, 마츠마에(松前)를 매개로 한 대 아이누 관계의 창구가 설치되어, 그것을 막부가 통제하기로 했다.
목차
책을 내면서


제1편 : 임진왜란의 역사적 성격

제1장 국제전쟁으로서의 임진왜란과 역사 인식
Ⅰ. 임진왜란은 16~17세기의 동아시아 세계에 무엇을 초래했는가
Ⅱ. 임진왜란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 -그 요인-
Ⅲ. 일본의 임진왜란 연구의 몇 가지 논점
제2장 壬辰倭亂에 관한 日本의 歷史認識
Ⅰ. 江戶時代의 조선 인식 및 朝鮮征伐사관
Ⅱ. 근대역사학에서 朝鮮征伐사관과 文祿慶長の役연구
Ⅲ. 전후 및 현대 역사학에서 조선침략 연구와 문제의식
Ⅳ.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연구의 과제
제3장 壬辰倭亂에서의 두 개의 和議條件과 그 風聞
1. 머리말
2. 두 개의 和議條件과 그 성립
3. 朝鮮에 침투한 和議條件의 風聞
4. 淸正惟政會談과 和議條件
5. 明冊封使의 日本渡海와 그 파문
6. 秀吉의 격노와 明皇帝의 진노 – 맺음말을 대신하며


제2편 : 진주성전투와 사천해전

제1장 壬辰倭亂과 晉州城 戰鬪
머릿글
Ⅰ. 第一次진주성 戰鬪
Ⅱ. 豊臣秀吉이 다시금 진주성 공략을 의도하게 된 경위
Ⅲ. 진주성 전투의 경위
Ⅳ. 맺음말
진주성 전투 관계 略年表·
제2장 제1차 진주전투의 경위와 제2차 진주전투의 요인
1. 처음에
2. 제2차 진주전투
3. 제2차 진주전투에 이르게 된 배경
4. 진주성을 노린 히데요시의 의도-마무리를 대신하여
제3장 壬辰倭亂과 李舜臣, 泗川海戰을 중심으로
Ⅰ. 秀吉의 水軍編成
Ⅱ. 壬辰倭亂期의 海戰


제3편 : 임진왜란과 지역 민중

제1장 강원도에서의 임진왜란
Ⅰ. 머리말
Ⅱ. 왜군의 조선팔도 경략과 毛利吉成의 제4군
Ⅲ. 毛利吉成의 강원도 침입
Ⅳ. 島津義弘의 강원도 침입
Ⅴ. 맺음말
제2장 「亂中日記」에 보이는 降倭에 대하여
서 론
Ⅰ. 亂中日記는 降倭에 대하여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가.
Ⅱ. 亂中日記의 降倭기술에서 말할 수 있는 것
Ⅲ. 李舜臣은 降倭를 어떻게 편성하고, 이용했는가.
Ⅳ. 降倭는 어떻게 살아갔는가 -降倭의 人間模様-
결 론
제3장 정유재란과 전라도의 민중
1. 머리말
2. 왜란의 재개와 명 조선군의 패배
3. 코베기의 횡행과 그 실태
4. 왜군의 전라도 주둔 지배
5. 맺음말


제4편 : 한・중・일 사료 속의 임진왜란

제1장 壬辰倭亂研究와 「朝鮮王朝實録」
머리말
Ⅰ. 일본에서 朝鮮王朝實錄의 보급과 이용에 대하여
Ⅱ. 우리들의 朝鮮王朝實錄講讀會경위
Ⅲ. 壬辰倭亂연구에 있어서 朝鮮王朝實錄의 의의
제2장 「亂中日記」의 世界와 李舜臣
들어가며
Ⅰ. 도적 절도에 나선 하층민
Ⅱ. 水營을 지탱했던 기술자 집단
Ⅲ. 船軍이 된 降倭·
Ⅳ. 바다를 아는 鮑作人
맺는 말
제3장 임진왜란에 관한 일본・한국・중국의 史料와 그 특징
시작하며
제1절 1592(宣祖25)年7月17日(日本曆16日), 제1차 平壤戰鬪에 관한 史料와 그 특징
제2절 1593(宣祖26)年1月6~9日(日本曆5~8日), 제2차 平壤戰鬪에 관한 史料와 그 특징
제3절 1593(宣祖26)年1月25~27日(日本曆24~26日), 碧蹄館의 싸움에 관한 史料와 그 특징


부록 李舜臣 年譜
엮음: 김문자
상명대학교 사학과 졸업
일본 오차노미즈[お茶の水]여자대학 문학박사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엮음: 손승철(孫承喆)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고, 성균관대 사학과를 거쳐 동 대학원에서 <조선시대 한일관계사>를 전공하여 박사를 받았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대학, 도쿄[東京]대학, 규슈[九州]대학에서 연구했고, 1981년부터 강원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7년 정년퇴직하고 명예교수로 있다.
한일관계사학회를 창립했고,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총간사, 동북아역사재단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10년 넘게 전국 교사 및 대학생들을 인솔하여 조선통신사의 옛 길을 답사하고 있으며, 이 책은 그 성과를 집대성한 것이다.
저서로 『조선시대 한일관계사연구』, 『조선통신사』 외에 10여 권이 있으며, 사료집 『한일관계사료집성』(전32권)과 70여 편의 논문을 썼다.